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는 국민 의료서비스 보장 측면에서 비교적 잘 설계 됐다는 평가를 받는 축에 속한다. 하지만 지출구조로서 접근하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준조세 재정 특성상 지속성과 투명성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신약 급여는 늘 보수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글로벌 제약업계 입장에서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다국적 제약사들의 '코리아 패싱'도 이에 기인한다. 이로 인해 국내 중증·희귀질환 환자의 혁신신약 접근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건강보험 지출구조 개선을 통해서 중증·희귀질환의 보장성을 강화하는 방향은 없는지 들여다본다.
(상) 갈 길 먼 국내 중증·희귀질환 치료 접근성
(중) 연간 치료비만 5억…삶 포기하는 환자들
(하) 경증질환 보장 낮추고 중증질환 혜택 넓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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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파나뉴스 = 최성훈 기자] 중증·희귀질환 환자들의 신약 치료 접근성이 개선됐지만, 갈 길은 멀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전히 국내 건강보험 재정 내 신약에 도입 속도는 경제개발도상국(OECD) 평균과 비교해서 더디기 때문이다.
의료계와 업계는 전체 보험 약제비에서 신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 지적했다. 이들은 건강보험 지출구조를 효율화하지 않는 이상 국내 환자들은 적절한 신약 치료 혜택을 충분히 받지 못할 거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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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46개월 vs 독일 11개월·일본 17개월
한국의 신약 도입 속도를 살펴보면 '선진국'이라는 수식이 무색하다. 한국글로벌의약품산업협회(KRPIA)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OECD 국가 중 신약 허가 후 급여까지 걸리는 시간은 상당히 길다.
최근 10년간(‘12~’21) 미국, 유럽, 일본에 허가된 신약 460개의 도입 속도를 비교했을 때 한국은 평균 허가까지 28개월, 급여까지 18개월로 총 46개월의 기간이 소요된 것이다.
독일 11개월, 일본 17개월에 비해 약 2~3년 뒤쳐진 속도다.
특히 항암신약 및 희귀질환 신약의 경우 글로벌 출시 후 한국에 '비급여'로 출시되기까지 약 27~30개월 정도가 결린다.
영국, 독일 등 선진국이 평균 12~15개월, 일본이 18~21개월 걸리는 것에 비해 2배 정도 기간이 더 걸린 셈이다.
비교적 급여 등재 속도가 빠른 캐나다와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신약 등재가 완료된 품목을 대상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첫 번째 제출-급여 고시일까지 걸린 기간을 캐나다 급여결과 검토기간을 비교해보면 최대 5년 9개월까지 차이가 벌어진다.
다발골수종 치료제 '닌라로(익사조밉시트레이트)'의 경우 캐나다는 급여 신청일부터 급여까지 217일인데 반해 한국은 1266일이 소요됐다.
신세포암 치료제 '여보이(이필리무맙)'도 캐나다가 279일이 걸린 반면, 한국은 1090일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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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패싱'은 결국 환자 생존여명 단축
늦은 급여 속도는 신약 부재로 이어진다. KRPIA에 따르면 글로벌 최초 허가 기준으로 1년 안에 한국에 도입되는 신약 비율은 매우 낮은 5% 수준에 그치고 있다.
더딘 급여 속도와 약가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폐섬유증 치료제 '오페브(닌테다닙)'가 대표적이다. 이 약물은 2016년 한국에 출시됐지만, 높은 약가와 대체 약물과 비교로 인해 8년째 비급여로 묶여 있다.
또 신약 급여 진입이 늦어지면서 일부 암종의 경우엔 선진국 대비 낮은 생존율로 이어진다. 독일과 미국 다발골수종 환자 생존율은 각각 62%, 61%인 반면, 우리나라 다발골수종 환자 생존율(2016년~2020년)은 51%에 그친다.
최신 치료 부재 때문이다. 다발골수종 글로벌 가이드라인에선 2010년대 후반 1차로 DVTd(다잘렉스+보르테조밉+탈리도마이드 +덱사메타손)병용과 2차 치료로 DVd(다잘렉스+보르테조밉+덱사메타손)병용 또는 DKd(다잘렉스+키프롤리스+덱사메타손)병용 등을 권고했지만, 국내선 이제 다잘렉스 1차 치료 급여 확대를 위한 약가협상이 진행 중이다.
이마저도 다발골수종 환자들의 요구도가 큰 DVd 병용이나 DKd 병용에 대한 급여 논의는 여전히 미궁 속이다.
업계 관계자는 "OECD 국가 평균 신약 도입률이 18%인 것과 비교하면, 5%는 3배 넘게 차이 나는 구조"라며 "더딘 급여 속도와 낮은 약가 산정 때문에 결국 코리아 패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분당차병원 혈액종양내과 문용화 교수는 "신약 승인은 데이터가 나오면 어느 정도 해주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해주는데, 건강보험 급여 적용 여부는 다른 문제"라면서 "건강보험 급여 적용 여부는 우리나라 의료비 전체 예산과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치료제 효과가 너무 좋다면 환자들의 성화가 커서 조금 더 압박을 받을 가능성은 있겠지만, 정부 예산을 고려해 건강보험 재정이 바닥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가급적 이를 늦추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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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약품비 중 신약 지출 비용 13.5%
늦은 급여 진입은 중증·희귀질환에 대한 보장성 후퇴로 갈 수밖에 없다. 실제 국내 건강보험 재정에서 신약이 차지하는 비율은 OECD 최저 수준이다.
최근 6년 간(‘17~’22) 국내 건강보험 재정 내에서 신약에 대한 지출은 총 약품비 대비 13.5%다. 약가 참조국인 A8 및 OECD 국가 평균과 비교해 봐도 매우 낮다. 반면 해외 선진국들은 전체 약품비 지출액 중 신약이 60~70%를 차지한다.
희귀질환 치료제만 놓고 보면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정부는 환자의 신약 치료 접근성을 높이고자 2015년 '경제성평가 자료제출 생략제도'를 도입했다.
경평생략 제도의 대상 약제는 대체제가 없거나 환자 수가 적어 통계적 근거 생성이 곤란한 약제에 대한 환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취지다.
2022년 7월까지 26개 약제가 이 제도를 적용해 급여권에 진입했다. 또 2022년 신약으로 등재된 항암제와 희귀질환 치료제의 경우 전체 87.5%가 경평 생략 약제로 평가됐다.
그럼에도 국내 신약의 등재유형별 약제수 및 약품비 지출 현황 분석 결과에 따르면, 건강보험 재정 내 총 약품비 대비 경평면제 약제 지출 비중은 0.6%, 진료상 필수약제는 0.3%로 극도로 낮았다.
경평 생략 제도를 활용해도 신약 급여 속도가 더디기 때문이다. 의료계에선 항암제의 경우 경평 면제 트랙으로 들어오더라도 암질환심의위원회에서 약가를 깎는 등 기준이 너무 까다롭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A상급종합병원 교수는 "암질심에서 임상적 유효성뿐만 아니라 비용효과성까지 꼼꼼하게 따지기 때문"이라며 "치료제 급여 등재는 비교적 완화하는 대신 리얼월드데이터(RWD) 등 사후심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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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적정가치 보상 개선돼야
이로 인해 중증질환 보장률은 과거보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보험 데이터에 따르면 4대 중증질환(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희귀·중증난치질환) 보장률은 2022년 80.6%로 전년 대비 3.4%p 감소했다.
결국 국내 환자들의 적절하고 신속한 신약 치료를 위해선 신약 적정가치 보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ICER 임계값 선정에 '혁신성'을 반영하는 등 구체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제언이다.
KRPIA 이영신 부회장은 "국내 건강보험 재정에서 신약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외와 비교했을 때 여전히 크게 낮은 수준이다"면서 "특히 치료 사각지대에 놓인 중증·희귀질환에 대한 보장성이 뒤떨어진다는 점에서 국내 환자들이 적절한 신약 치료 혜택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국민들이 건강보험이라는 사회 안전망 아래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환자의 질병부담이 큰 질환에 치료 보장성 강화 우선순위가 반영돼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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