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산업의 새로운 영업모델로 비뇨의학과 그것도 대학병원, 종합병원 위주의 전문판매법인으로 출발하여 관심을 모았던 아진약품(대표 조성룡)의 1년여를 뒤돌아 보며 새삼 제약영업의 여러형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100年 한국제약영업을 논(論)할 근거는 미약하고 불충분하지만 구석기시대의 영업형태에서 작금의 첨단 Digital 시대의 영업이 도래하기까지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되어 회사의 매출을 끌어 올리려는 노력들이 눈물겹게 이어지고 있는게 사실이다.
최근에는 CSO라는 영업형태가 확대일로에 있고 제약회사에 몸 담았던 영업맨들이 혹성탈출의 유인원처럼 제약회사 영업을 지배하는 진화과정을 거치고 있는듯 하다.
과거 70년대 이전에는 생산이 곧 판매이던 시절이 있었고, 심지어는 의약품을 트럭에 싣고 지방을 순회하면 지역마다 서로 약을 많이 달라며 환영 Plag Card를 걸어놓고 기다리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70년대 초반 유한양행 서낭석 본부장께서 하신 말씀)
필자의 직접경험으로도 70년대 중·후반에 엄청난 제품력으로 잘나가던 영진약품 시절에는 MR들이 종일 당구치고, 고스톱치고 놀고 귀사해도 여러 건의 전화주문이 경리 여사원에 의해 메모되어 있었고, 그것이 부족하면 친한 거래처에 나름대로 짐작한 Inventory로 소위 '오시우리'를 쳐도 탈이 나지 않았던 시절을 경험하였다.
또한 도매영업은 유력 도매상으로부터 선어음을 수취하여 회사에 선입금시키고 목에 힘주고 떵떵거리던 고참 도매부장도 자주 목도하였다.(동광약품이 노바킹, 판타제, 트리코트크림 等의 유명광고 상품을 영업하던 때)
70년대 초반까지는 마케팅부서를 별도로 운영하던 회사가 거의 없었고 영업이 곧 마케팅이던 好시절도 있었다.
나는 회사를 옮겨서(동광약품에서 영진약품으로) 선배, 동료시민들에게 불려다니며 입사환영회 명목으로 종일 함께 놀아도 목표달성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회사도 옮긴데다가 거래처도 생소하고 나의 소심한 성격때문에 불안하여 그들을 뿌리치고 거래처 방문을 하곤 했는데 계속 뿌리치기가 어려워서 급기야는 담당소장 허락하에 일주일에 2~3회만 출근하면서 현장중심의 course call을 하게 되었고 그것 때문이었는지 주어진 매출목표가 300% 이상을 넘기기도 하였다.
입사 9개월만에 텃새들을 물리치고(?) 종병부서로, 그것도 서울대학교병원과 국립의료원을 담당하는 간납과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영업사원을 MR이라고 부른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제품 디테일을 목적으로 프로디테일 부서를 만들기도 하고 PM을 현장에 배치하기도 했는데 결국은 외자사들의 호칭을 따라 MR 이라고 부르게 된것이다.
작금의 다국적 외자사의 국내법인이 탄생하기 이전에는 Joint Venture 형태의 국내제약사와 지분을 나누어 참여하여 Co-Promotion하는 형태가 성행 했었다. 산도스(메러릴, 메덜진, 카펠코트, 옵타리돈)는 동광약품에 위탁되었다가 나중에 동화약품으로 파트너쉽이 넘어가기도 하였고 태광사노피도 있었다.
대부분 국내 제약사에 얹혀 지냈고 그후에는 국내 지국이 탄생하여 소위 제품설명회(세미나) 등의 마케팅활동을 지원해 주면서 관여도를 높혀서 코프로모션이 활성화 되기도 하였다.
결국 독자적인 한국법인이 탄생되었지만 국내영업조직에 품목을 위탁판매하는 시스템은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의약품 판매의 행태나 스킬은 수없이 많은 방법과 편법이 공존하면서 중간세계를 거쳐 소비자에게 투약되는데 그런 변천과정에서 편법이 우위를 점하기도 하고 총판이라는 전문 유통회사(도매상)가 실력 발휘를 하던때도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희대의 사건 하나가 공개 되어야 한다.
창원에 있는 C도매상에 한미약품 병원영업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세포탁심, 트리악손, 폰티암 等을 창원, 마산지역에 총판영업으로 운영하게 되었는데 사후관리 과정에서 보험약가가 반토막으로 인하되어 병원영업부의 존재가치를 잃게 되었다.
그에 책임을 지겠노라고 사직서를 제출했더니 선대 임성기 회장께서 '똥 싸놓고 어딜 도망가! 실무책임자 처벌하고 자네는 남아서 해결해!'
복지부 보험관리과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걸고 엎치락 뒤치락하는 가운데 가처분 승소판결로 약가는 회복되었지만, 4년 2개월간의 지리한 재판은 계속되었다.
그래도 결국 대법원 본안소송에서 승소하였고, 이는 보험약가관리의 행정권한 일탈과 요양급여기관의 납품과정에서 법리적용이 잘못 되었음을 인정 받아 역사적인 판례를 만들게 되었다.
당시 수임변호사가 김앤장의 노경식 변호사 였는데 그는 이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보험약가 관리 전반에 이정표를 만들어 놓는 업적을 남겼으나 불행하게도 얼마전 작고했다는 소식에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 CSO 약가관리 기준이 자유로운 것은 이 사건의 대법원 판례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작금의 CSO는 그 총판의 진화로 탄생한 판매기술일 것이며, 생산과 판매의 역할분담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듯 하다.
제약회사에 영업사원으로 입문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때가 되면 소모품으로 취급되어 짤리기도 하고 탁월한 실적의 영업사원 일지라도 결국 피라미드 조직의 정점에 이르기에는 별따기 만큼 어렵다. 그래서 자신의 중간세계의 인적 네트웍을 활용하여 창업에 나서는 영업맨이 적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그 특정한 판매력, 영업력은 부익부 현상으로 쏠림이 생기고 제약사는 결국 상위 CSO를 선택하려 한다. 그러니 창업만이 능사는 아니다.
아진약품(조성룡 약사)은 나름 사업을 차별화하여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종합병원에서의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소수 정예인력으로 일당백을 자처하면서 맨파워를 통한 영업으로 비뇨의학과의 특정치료분야에서 마켓쉐어 1위를 달성하였다.
아울러 많은 제약사들이 아진약품의 영업력에 큰 관심을보이고 있어 또다른 제품 포트폴리오를 기획하고 있다.
불과 1년여 만에 유한양행을 비롯한 7~8개 파트너 회사의 관련 제품으로 한 분야의 매출점유율 상위에 랭크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며, 이러한 유형의 창업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제약산업은 R&D나 매니지먼트가 중요하지만, 중간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업의 맨파워가 성패를 가르는 것 같다.
제약영업이 특수한 형태로 계속 진화하면서 작금의 의료계 혼란으로 새우등 터지는 환경을 극복할 신의 한수가 절실한 때이다.
어서 중간세계가 안정을 찾아 제약 영업이 선순환 되기를 학수 고대한다!
[기고] 임선민 아진약품 부회장(전 한미약품 총괄사장)
경희대학교 영문학과 출신인 임 부회장은 1974년 동광약품에서 제약영업과 인연을 맺은 후 1979년 영진약품 영업팀으로 이직해 15년간 근무했다. 1992년 한미약품 영업이사(병원담당)로 자리를 옮겨 2011년까지 한미약품 총괄사장을, 2013년 태준제약 영업총괄 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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