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떤 응급실 의사라도 같은 대응을 했을 사건에 억대 배상판결이 내려지자 '운이 좋으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됐다는 것.
정책과 법은 개선될 기미가 없으니 직역단체가 아닌 현장 의료진에서부터 '다 함께 사직서 내고 응급실 문을 닫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지는 실정이다.
27일 대한응급의학의사회가 개최한 긴급 기자회견에서는 한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의사회에 사직서 제출 운동 등 집단 행동을 주도할 의향이 있는지를 묻는 상황이 연출됐다.
일반적으로 단체가 행동을 결정하면 회원이 참여하는 것과 달리 현장에서 행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단체에 주도할 의향을 묻는 이례적 상황이 연출된 것.
이 같은 목소리가 나온 배경은 과도한 사법 리스크에 기인한다.
대표적으로 2심과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로 변경됐지만 1심에서 응급의학과 의사가 법정구속되고 7년간 민사합의와 형사재판을 겪은 지난 2013년 소아횡격막탈장 사망사건, 2014년 전공의 1년차 시절 흉통으로 내원한 환자의 대동맥박리를 진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액의 민사 판결에 이어 금고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은 사건 등이 이어져 왔다.
방점을 찍은 사건은 최근 언론을 통해 알려진 5억 원대 배상판결이다. 만성신장질환을 가진 중증환자가 악화돼 응급실에 내원했고, 현장에선 기도삽관과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지만 심정지로 인한 뇌 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가 된 사건이다.
현장에선 어떤 응급의학 전문의도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는 해당 사건이 알려지며 큰 두려움이 생겼다는 것.
기자회견에서 사건을 설명한 최일국 응급의학의사회 기획이사는 "어떤 응급의학과 의사라도 호흡수가 30회 이상 늘어나고 의식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기관내 삽관을 먼저 하는 것이 순리"라며 "단지 초기에 모니터링과 응급처치에 대한 의무기록이 부족하다는 이유, 그로 인해 최선의 조치를 다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5억 원이 넘는 배상판결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떤 의사가 심폐소생술을 하는 와중에 기록을 남기는지를 일일이 보며 하겠나. 오히려 심폐소생술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그 자리에 누가 있어도 똑같이 했을 거고 똑같은 일을 겪었을 거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근무 중인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장 역시 해당 사건은 현장에 충격을 주고 있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기사들을 여러 번 읽어봤고 '나였으면'이란 얘기를 많이 나눠봤다. 의무기록을 다 본 것은 아니지만 제가 봐도 똑같이 기관 삽관을 하고 치료하고 심폐소생술을 했을 것 같고, 그럼에도 환자가 사망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면서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전공의 선생님에게도 물어봤는데, 다들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다.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는 건가라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응급실은 중환자가 많이 오고 사망이나 결과가 나빠지는 사례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며 "피하려면 결국 우리가 경증 환자를 보는 쪽으로 가는 방법 말고는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집단 행동 필요성을 제기한 전문의도 자신을 23년차 응급의학 전문의라고 소개하며 해당 사례를 언급했다.
그는 "대동맥박리 등 사건은 운이 좋으면 피해갈 수 있지만, 이번 케이스는 아무리 운이 좋아도 반드시 사법 처리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의 판결"이라며 "예전 같으면 '운이 좋으면 빠져나갈 수도 있겠네'였는데, 이번 판결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한다. 도저히 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매일 중환자를 보는 응급의학과 의사 입장에선 이 같은 선례가 생긴 이상 불안에 떨며 일할 수밖에 없는 만큼, 언제가 될지 모르는 사법 리스크 개선에만 기댈 수는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정치권이나 사법부나 자기 일 아니라고 신경 쓰지 않는다. 계속 고려하겠다고 하는데, 안 하겠다는 이야기"라며 "한 달에도 두세 번, 대학병원은 거의 매일 이런 중환자를 본다. 법을 만들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현장에선 이미 사직서를 내고 나가자거나 응급실 문을 닫고 파업하자는 얘기까지 나오는 만큼, 사직서를 내더라도 집단 행동으로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사직서를 내더라도 집단적으로 하지 않으면 응급실은 바뀌지 않는다. 응급의학의사회에서 주도적으로 집단 사직서 제출 운동을 하실 의향이 있는지 궁금해서 참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형민 응급의학의사회장은 집단 행동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설명했다.
이 회장은 "파업할 수도 있고, 사직서를 제출할 수도 있지만 응급의료체계를 위해, 응급환자를 위해 무엇이 정답일지는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응급의학 전문의는 대체 불가 인력이라고 생각한다. 개별 회원에 대한 보호 활동도 적극 추진해 나가면서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기자회견을 통해 응급의학 전문의 이탈이나 전공의 중도 포기, 지원율 저하 등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만큼 지금이 붕괴 전 개선을 위한 마지막 골든타임이란 점은 분명히 했다.
이 회장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기본 원칙은 천천히 나빠지는 사람은 천천히, 빨리 나빠지는 사람은 빨리 치료하는 것"이라며 "다음에 동일한 내용으로 다시 기자회견을 하게 된다면 모든 국민이 응급의료의 종말을 눈으로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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