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는 국민 의료서비스 보장 측면에서 비교적 잘 설계 됐다는 평가를 받는 축에 속한다. 하지만 지출구조로서 접근하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준조세 재정 특성상 지속성과 투명성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신약 급여는 늘 보수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글로벌 제약업계 입장에서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다국적 제약사들의 '코리아 패싱'도 이에 기인한다. 이로 인해 국내 중증·희귀질환 환자의 혁신신약 접근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건강보험 지출구조 개선을 통해서 중증·희귀질환의 보장성을 강화하는 방향은 없는지 들여다본다.
(상) 갈 길 먼 국내 중증·희귀질환 치료 접근성 (중) 연간 치료비만 5억…삶 포기하는 환자들
(하) 경증질환 보장 낮추고 중증질환 혜택 넓혀야
[메디파나뉴스 = 최성훈 기자] A씨는 30년 이상 경력의 베테랑 사회복지사다. 주변에서 그의 열정을 칭찬할 정도로 늘 활기 넘치던 그였지만, 그 말도 이제 옛말이 됐다.
그는 언젠가부터 양치질을 하기 힘들 정도로 기운이 없어졌고, 3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로 극심한 피로감이 나타났다.
결국 A씨는 휴직을 결정했고, 휴직소견서를 받기 위해 방문한 병원에서 굉장히 낮은 빈혈 수치가 발견됐다. 이후 신장내과와 혈액종양내과의 협진 및 유전자 검사를 통해 이름도 생소한 비정형 용혈성 요독 증후군(aHUS)을 진단받게 됐다.
비정형 용혈성 요독 증후군이란 체내 이물질이나 병균 침입 시 이를 파괴하는 면역체계인 '보체' 활성이 조절되지 않아 생기는 질환이다. 환자 약 79%가 발병 후 3년 내 사망하거나 투석이 필요하며 영구적인 신장 손상이 발생할 수 있다.
또 비정형 용혈성 요독 증후군은 극희귀질환(Ultra rare disease)으로 분류된다. 극희귀질환은 희귀질환 중 유병인구가 200명 미만인 경우를 뜻한다.
이에 A씨도 난생 처음 듣는 병명에 '그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든 생각은 돈이라고 했다. 담당의사가 치료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해줬는데, 산정특례 혜택을 못 받는다면 1년 치료비는 약 5억원이었다.
다행히 A씨는 약제 사전승인제도를 통해 건강보험 혜택을 받아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A씨는 "당시 여력이 없다는 생각에 그냥 주변 정리를 시작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 117년 만 폭설에도 권익위 찾은 까닭
그나마 A씨는 나은 케이스였다. 급성 증세가 발생하지 않아 치료를 원활히 받을 수 있었던 덕분이다. 지난달 26일 aHUS 환자와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는 서울 광화문 인근 국민권익위원회 정부합동민원센터를 찾았다. 이날은 117년 만에 내린 11월 폭설이었다.
이들은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상대로 급성 희귀질환 환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전승인제도 개선을 촉구하며, 권익위에 고충 민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면서 "비정형 용혈성 요독 증후군 치료제 일반심사 대상 전환을 권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전승인제도가 급성 희귀질환 치료 보장성을 약화시킨다는 우려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고가 희귀질환 치료제를 투여하기 전 환자 상태가 건강보험 급여 지원으로 치료받기 적합한지에 대해 심의하는 사전승인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aHUS 치료제 중 하나인 '에쿨리주맙(제품명: 솔리리스)'도 여기에 해당한다. 애쿨리주맙이 aHUS 원인인 보체를 억제해 혈전성 미세혈관병증(TMA) 발생을 막아주고 신장 기능을 장기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치료 효과를 나타낸다.
해당 임상연구에 따르면 애쿨리주맙을 사용한 환자 88%는 치료 2년간 합병증이 발생하지 않았다. 또 조기에 치료를 시행할수록 신장 기능 개선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애쿨리주맙 약값이 약 4억원에 달하기 때문에 의료진은 처방 전 심평원으로부터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 사전심의는 심평원이 매월 1회 환자 케이스를 모아 진행하고 있지만, aHUS는 환자 특성을 고려해 14일 심의기간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의료계는 현재 사전승인 방식으론 사실상 급여 처방을 제한하는 꼴이라 지적했다.
전진석 순천향대 서울병원 신장내과 교수는 "혈전성 미세혈관병증으로 인한 신장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진단 24시간 내 애쿨리주맙 치료를 권장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빨리 투약 받을 수 있는 기간이 무려 2주다. 응급심사라는 말이 적절치 않은 심사방법"이라고 말했다.
◆ 애쿨리주맙 aHUS 사전승인율 18% 그쳐
까다로운 aHUS 급여 조건 역시 처방 허들로 작용한다고 했다. aHUS 환자가 급여 치료를 받기 위해선 8가지의 혈액학적 조건과 신장 손상 등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서, 9가지의 제외 기준에 단 1가지도 해당돼서는 안 된다. 해외 aHUS 급여 기준과 비교해도 매우 까다로운 편이다.
이에 애쿨리주맙 aHUS 사전승인율은 지난 8월 기준 18%에 그친다. 사전승인을 받고 있는 다른 치료제의 평균 승인율(60%)에 비하면 매우 낮다.
심평원이 사전심의 서류 제출 이후 약제를 투여할 경우 환자가 지출한 치료비를 사후 환급해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낮은 승인율로 인해 사용은 '언감생심'이란 지적이다.
거액의 약값을 환자가 먼저 부담하고 환급 가능성을 초조하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 5년간 aHUS를 진단받았지만, 사전승인제도를 통과하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한 성인 환자는 총 39명이다. 그 중 환자 82%는 5년 이내 말기 신부전증으로 인해 사망했다.
연합회 김재학 회장은 "비정형 용혈성 요독 증후군 환자에 대한 승인률이 낮은 상황에서 환자가 3000만원 이상 비용을 선부담하고, 추후 환급을 보장할 수 없는 제도로 회피하는 것은 행정 편의만 고려한 무책임한 방침"이라고 지적했다.
◆ 국민 33% “암 죽음보다 치료비 부담” 걱정
이같은 부담은 희귀질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립암센터가 2022년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암 인식도 조사에 따르면, 암에 걸렸을 때 걱정되는 부분으로 응답자 33.0%는 '치료비 부담'을 꼽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17.6%)보다 약 두 배 가까이 많은 셈이다.
취재를 통해 만난 B씨도 이와 같은 케이스다. B씨는 올해 1월 간내담도암 4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오른쪽 간에 8cm 크기의 종양과 암 전이가 확인됐을 당시, 그는 "앞이 캄캄했고 가족의 얼굴이 떠오르며 막막함에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단 이후 B씨에게 가장 큰 벽으로 다가온 건 치료비 문제였다. 면역항암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길 들었지만, 비급여인 탓에 치료비가 1억원을 넘어설 것이란 말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는 것.
다행히 사보험과 환자 지원 프로그램 도움으로 치료를 시작해 종양 크기가 절반 이상 감소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럼에도 B씨는 여전히 비용 부담은 걱정이라 했다.
그는 "치료 효과는 좋지만, 치료비 부담은 여전히 크다"며 "담도암 환자들이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지 않도록 제도적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혈액암 중 예후가 불량하다고 알려진 국내 다발골수종 치료 환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글로벌 가이드라인에선 '다라투무맙(제품명: 다잘렉스)'을 다발골수종을 1차, 2차 치료로 권고하고 있지만, 국내선 여전히 비급여로 남아있어 환자 사용이 제한적이다.
이에 다발골수종은 가급적 질병 조기 단계에 효과적인 치료제를 사용해 해당 병기를 길게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혈액암협회 박정숙 국장은 "다발골수종 자체가 완치보단 재발을 막아보자는 데 치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서 "내 몸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처음부터 좋은 치료제를 쓸 수 있다면 재발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은 가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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