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대한혈액학회 김석진 이사장, 임호영 학술이사, 김혜리 홍보이사. 사진=박으뜸 기자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백혈병, 림프종, 다발골수종 등 생명을 위협하는 혈액암은 더 이상 '불치병'만은 아니다. CAR-T와 같은 첨단 치료제가 등장하며, 일부 환자에게는 완치라는 희망이 현실이 되고 있다.
하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정반대다. 환자에게 새 삶을 안긴 치료제는 삭감 통보로 돌아오고, 진단과 치료를 맡을 전문의는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대한혈액학회가 마주한 현실은 '치료의 진보'와 '현장의 위기'라는 두 축 사이의 간극이다. 인력난, 삭감, 급여 지연이라는 삼중고는 그 간극을 더욱 벌리고 있다.
학회는 말한다. "이대로라면, 치료할 의사가 없다."
◆ 고령화에 신규 유입까지 막혀‥혈액학 전문의 '절벽' 위기
그간 우려로만 여겨졌던 상황은 이제 통계로 드러났다. 대한혈액학회는 학회 창립 이래 처음으로 자체 설문조사를 실시해, 현장의 인력난을 수치로 확인했다.
국내 혈액학 의료진 149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실제 활동 중인 혈액내과 전문의는 전국에 160명에 불과했다. 이 중 소아혈액종양 분과 전문의는 80명이었지만, 은퇴했거나 혈액암 환자를 보지 않는 인력을 제외하면 실질 인원은 74명 수준이다. 진단검사의학과 골수 판독의는 82명, 병리과 혈액암 판독의는 55명으로 조사됐다.
영국,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주요 국가와 비교해도 인구 대비 혈액학 전문의 수는 매우 적다. 인구 10만 명당 혈액학 전문의 수는 영국 2.92명, 미국 0.707명, 일본 1.109명인 반면, 한국은 0.307명에 그쳤다.
대한혈액학회 김혜리 홍보이사는 "국내 혈액학 의료진은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도 매우 부족한 수준"이라며 "그마저도 대부분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고 말했다.
응답자들은 인력 부족으로 장시간 근무와 충분치 못한 휴식에 시달리고 있으며, 신체적·정신적 부담이 상당하다고 호소했다. 여기에 의료소송, 건강보험 구조의 불합리, 수가 삭감, 신규 인력 양성의 한계까지 겹치며, 미래를 부정적으로 전망하고 '퇴사'를 고려 중이라는 응답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고령화였다. 혈액학회 조사에 따르면 전체 전문의의 절반 이상이 50세 이상이었다. 연령 분포를 보면 혈액내과 45%, 소아혈액종양 53%, 병리과 49%가 50세 이상이었고, 60세 이상 비율도 각각 19%, 26%, 13%에 달했다.
신규 전문의 유입이 줄어드는 반면, 기존 전문의들은 은퇴를 앞뒀거나 이미 임상 현장을 떠난 상태다. 이대로라면 소아혈액암을 진료할 수 있는 의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 수 있다는 염려가 크다.
학회는 다발골수종, 백혈병, 림프종 등 혈액암 환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문 인력의 고령화가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혈액암은 완치를 목표로 하는 치료가 대부분인 만큼, 장기적인 접근과 전문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김혜리 홍보이사는 "백혈병 진단과 골수이식을 맡을 전문의가 줄고 있다. 신규 환자가 발생했을 때 후속 진료를 이어갈 후배 의사가 없다면, 지속적인 치료가 가능할지조차 의문"이라고 말했다.
전문의 부족은 진단 지연으로도 이어진다. 혈액암은 조기 진단 여부에 따라 치료 성과가 크게 달라지기에, '진단 시기'는 곧 생존율을 결정짓는 요소다.
김 홍보이사는 "복잡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을 가진 환자들에게 양질의 진료를 제공하려면, 혈액학 전문 인력에 대한 국가적 지원과 정책 개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환자에게 희망 준 CAR-T‥돌아온 건 삭감 통보
CAR-T 치료제는 혈액암 치료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적인 기술이다. 환자의 면역세포를 추출해 암세포를 공격할 수 있도록 유전자 조작한 뒤 다시 체내에 주입하는 방식으로, 기존 항암 치료에 반응하지 않던 환자에게도 새로운 치료 가능성을 열었다.
재발 및 불응성 B세포 급성림프모구백혈병(ALL),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DLBCL) 등에서 의미 있는 치료 성과가 다수 보고됐으며, 일부 환자는 생존 기간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처럼 의학적으로 획기적인 치료제임에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급여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삭감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현장 의료진은 '기준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치료의 정당성까지 의심받는 분위기 속에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일부 의료진은 "치료가 종료된 지 오래된 환자까지 삭감 대상이 되는 상황"이라며, "매달 삭감 현황이 병원에 보고되고, 이에 따라 문책을 받는 일이 빈번하다"고 전했다.
이 탓에 현장의 분위기는 차갑기만 하다. 현장에서 CAR-T를 직접 집도해온 의료진들은 정작 치료 효과가 입증된 환자조차 삭감 대상이 되는 현실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김석진 대한혈액학회 이사장은 "CAR-T 치료로 생존 가능성이 없던 환자들이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고가 치료에 따른 삭감 책임뿐이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는 "의학적으로 분명히 필요한 환자임에도, 경직된 기준 때문에 방어 진료를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며 "이로 인해 적극적으로 치료에 나서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 "혈액암은 혈액암답게 평가돼야"‥전문 위원회 신설 촉구
학회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산하 암질환심의위원회의 운영 방식에도 구조적 한계가 있다고 꼬집었다. 혈액암 치료제들이 연이어 암질심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학회는 혈액암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담 위원회' 신설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심평원은 학회의 요구를 반영해 암질심 내 혈액암 전문가 수를 9명(혈액암 7명, 소아혈액암 2명)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소아혈액암을 제외하고 전문가 중 1명은 심평원 소속이며, 대학병원에서 실제 환자를 보는 혈액내과 전문의는 6명뿐이다. 게다가 고형암 분야 역시 유사하게 인원이 늘어났기에, 실질적인 전문성 반영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학회의 판단이다.
학회는 "고형암도 암의 종류별로 특성이 다르듯, 혈액암 역시 급성백혈병, 림프종, 다발골수종, 만성백혈병 등 각 질환별 치료 접근이 다르다"며 "현재와 같은 구성으로는 세부 질환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임호영 학술이사는 "암질심 위원 41명 중 위암 5명, 폐암 6명인데, 혈액내과 전문의는 고작 6명"이라며 "현재로서는 별도 위원회 구성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더 나은 방안이 있다면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김석진 이사장도 "암질심은 어디까지나 임상적 유효성을 평가하는 기구"라며 "이 단계가 통과돼야 제약사도 약가 조정 등 후속 절차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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