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없는 소아응급환자에 살얼음판 걷는 아동병원들

소청과 붕괴에 의정갈등 겹치며 아동병원 소아응급실화 심화
"시민만 모르고 다 안다…누군가 죽어야 대책 내놓을 건가"

조후현 기자 (joecho@medipana.com)2024-07-01 05:59

아동병원협회 정성관 부회장, 최용재 회장, 이창현 부회장
[메디파나뉴스 = 조후현 기자] 수년간 이어진 소아청소년과 공백에 갈 곳 없는 소아응급환자가 아동병원을 찾아 오는 '아동병원 소아응급실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응급의료기관으로서 준비되지 않은 것은 물론 지원도 없이 법적 책임 부담만 안은 채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고 호소했다.

지난달 30일 대한아동병원협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소아응급실화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아동병원협회가 지난달 27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소아응급실화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에는 전국 117곳 아동병원 가운데 50곳이 답했다.

설문 결과 아동병원 50곳 가운데 44곳, 88%는 매달 구급차로 내원한 환자를 보고 있었다. 56%는 5건 이하, 22%는 10건 이하라고 답했다. 매달 소아응급환자를 10건 이상 보는 5곳 가운데 1곳은 120건을 봤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렇게 구급차로 아동병원을 찾는 소아환자는 경증보다 준중증 이상 환자가 더 많았다. 38%는 준중증 이상 환자가 없었다고 답했지만 52%는 5건 이하, 10%는 6~10건이 준증증 이상이었다고 답했다. 최근 중증 비율은 더 높아지는 상황이다. 응답자 46%는 경증환자가 줄고 중증환자가 늘었다고 답했다.

이들을 3차 병원으로 이송시키는 것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3차 병원전원이 원활히 진행된다고 답한 곳은 28%였고, 나머지 72%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아동병협은 수년간 지속된 소아청소년과 붕괴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이 의료진 소송으로 이어진 사건 이후 전공의 지원율이 급감한 상황이 수년간 이어지면서 소아응급 환자가 갈 곳을 잃었고, 응급실이 아닌 아동병원으로 응급환자가 오고 있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의정갈등으로 인한 대학병원 역량 저하까지 더해지며 현상은 심화되는 실정이다. 최근 부산 지역 아동병원을 찾은 1개월 영아는 진찰 후 상태가 좋지 않아 인근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외래는 가능하지만 입원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의료진과 119는 결국 인근 양산 부산대병원에 '무작정 밀고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양산 부산대병원은 인근에서 유일하게 소아 응급실 진료·입원이 돼 환자가 몰리며 진료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기 때문. 다행히 도착 순간 응급실 병상이 비어 있어 진료와 입원이 가능했고, 이후 환아가 받은 진단은 뇌출혈이었다.

최용재 아동병원협회장은 최근 항문 주위 고름집이 잡힌 4개월 환아 수술을 진행했다. 고름만 제거하면 되는 간단한 수술이지만, 그대로 두면 주변 항문 근육이 녹고, 아이는 평생 대변이 새는 문제를 안고 살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환아는 수술 가능한 인근 대학병원을 찾지 못했다. 수술은 해도 수술 후 배후 진료를 해 줄 소아과 의사가 없었다는 이유였다.

실제 아동병협에 따르면 지역 아동병원에서 KTAS(한국형 응급환자 분류도구) 1~2단계, 즉 생명이나 신체기능에 직간접적 위험이 높은 수준을 제외한 3~5단계는 처치 가능한 역량을 갖고 있다. 실제 3~5단계에 해당하는 응급 환자는 처치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응급의료기관으로 지정되진 않아 현장 어려움은 커지고 있다. 구급차가 들어오는 순간 진료는 올스톱되고 의사와 간호사 대부분이 투입돼야 한다. 일반진료와 달리 법적 책임 우려에 의료진은 불안을 호소하고, 대기 중이던 환자들은 병원 진료역량에 의심을 갖거나 불만을 터트린다. KTAS 1~2단계 환자일 경우에도 의사가 직접 전원을 수소문하고 구급차에 대동해야 해 진료는 멈춘다. 이 같은 어려움에도 진료비는 응급실이 아니기 때문에 3만원 내외다. 수익 감소와 법적 부담을 동시에 떠안는 셈이다.

이홍준 부회장은 "응급실은 응급환자 보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보니 인프라와 인적·물적 자원을 준비하고 있다"며 "저희는 지역의료도 책임져야 하는 와중에 응급환아가 들어오다 보니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창현 아동병원협회 수석부회장은 "만 명을 잘 보면 뭐하나, 한 명 잘못되면 뒤집어쓰고 난리가 난다"며 "그런 환자 제발 오지 않길 매일 기도만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소아의료체계 붕괴는 정부도 시청도 의사도 간호사도 119도 다 안다. 시민만 모른다"면서 "매일 위태롭게 살얼음판을 걷는데 사건이 터져 부각되지 않으니 시민들만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아동병원협회는 이 같은 문제가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소청과는 올해 정원 800명 가운데 100명밖에 모집하지 못했고, 그마저도 이번 의정갈등으로 대다수 사직할 예정이라 회복불능 상태라는 진단이다. 이에 더해 급여 수익만으론 병원 유지가 어렵고 의료분쟁도 늘어나 '탈소청과'가 가속 중이며, 초저출산까지 겹치면서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라는 설명이다.

아동병원협회는 이 같은 상황에 따라 아동병원이 응급실로서 역할해야 한다면 시설, 인건비 등 걸맞은 지원과 체계 정립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응급검사 재량권 응급실 수준 확대 ▲입원전담의 지원 ▲CT, MRI 등 진단·치료 장비 투자 국가·지자체 지원 ▲소아응급환자 관련 소방청 대응체계 마련 ▲응급환자 이송 의사 대동 시 보상 등을 제안했다.

최 회장은 "아이가 꼭 죽어야만, 죽는 사태가 생겨야 해결책을 내놓는 게 문명사회인가"라며 "예방할 수 있는 문제면 예방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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