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4년의 어느 날, TV 속 AI 아나운서가 원료의약품 수입국인 A국가와 교통의 요지인 B국가의 전쟁 상황을 전했다. 더욱이 신종 감염병의 한국 내 확산 사태까지 겹쳤다. 과거였다면 의약품 수급불안정 사태로 홍역을 치렀을 상황이지만, 이미 한 차례 크게 앓았던 대한민국은 수차례의 개선에 개선을 거듭해 완벽한 의약품 수급불안정 대비 시스템을 구축했다.
먼저, '의약품 수급불안정 관련 법률'을 통해 의약품 수급 관리 체계, 제약사의 필수의약품 및 원료의약품 생산에 대한 안정적인 이익 확보 방안, 관련 인센티브 제도 등이 가능한 법적 울타리를 만들었다.
여기에 복지부-식약처-국민건강보험공단-건강보험심사평가원-제약사-병원-약국-유통사 등이 하나의 유기체와 같이 움직이는 올인원 거버넌스를 구축했다. 이를 주축으로 의약품의 생산 및 수입량, 약국 등 현장에서의 약 사용량 등 의약품 수급 상황 공유 및 모니터링이 가능하고, 상황 변화에 따라 의약품 필요량을 AI가 예측해 알려주는 '의약품 수급 현황 모니터링 및 AI 예측 시스템'(가제)을 개발, 각 제약사 스마트 공장 체계와 거버넌스의 네트워크가 가능해지면서 국내 의약품 전체의 수요와 공급 조절이 가능해졌다.
또한, 공적전자처방전을 기반으로 처방전을 작성한 의사와 약국의 약사가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도록 변화시킴으로써, 병원과 약국 현장의 문제점 및 효율성을 크게 개선했다. 모니터링 및 예측 시스템을 벗어나버린 문제 발생으로 인한 위기 상황에도 즉각 대응이 가능한 시스템을 완성, 연이어 터진 큰 사건에도 의약품은 안정적으로 수급이 이뤄지고 있다.
여기까지가 가상의 2034년 미래, 또 다시 발생할 뻔했던 의약품 수급불안정 위기를 철저히 구축된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소란 없이 안정적으로 해결하는 이상향을 담은 시나리오다.
의약품 수급불안정 사태가 이어지지 않는 '이상향'을 위해 정부와 제약사, 관련 협회 등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 현실은 아직 의약품 수급불안정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발생했던 아세트아미노펜 제제의 수급 문제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코로나19 치료를 위해 아세트아미노펜 제제의 수요가 급증했고, 이후에도 호흡기질환 환자가 늘어나면서 아세트아미노펜 제제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제약사가 생산량을 늘려야 했지만, 제약사 입장에서는 낮은 수익성으로 인해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이에 정부에서는 제약사들의 아세트아미노펜 생산량 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약가를 인상했고, 제약사들도 이에 화답해 생산량을 늘리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급불안정 문제는 아세트아미노펜 외에도 다양한 품목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약가인상 등의 방법을 통해 수급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의약품을 환자에게 전달하는 약국 현장에서는 더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약사들은 올해 초 진행된 분회·지부별 약사회 정기총회 등에서 "품절약 사태로 인해 환자들이 처방된 약을 받기 위해 여러 약국을 전전하는 불편함을 겪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해결되지 않는 수급불안정 상황에 우선 대응하기 위해 약국끼리 교품을 하기도 하고, 대체조제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급불안정 상황은 진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속앓이를 호소한 것. 약사들은 의약품 수급불안정을 약사사회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꼽고 있다.
최근 대한약사회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민필기 대한약사회 부회장은 "약국만 40년을 해온 약사들도 '약이 없어서 조제를 못하는 경우는 처음'이라며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코로나19 이후 수 년째 이어지며 문제 해결이 아닌 고착화 위험을 보이고 있는 의약품 수급불안정 상황을 밝혔다. 실제로 지난 1월 대한약사회 차원에서 수급불안정 의약품 대책 마련을 위해 회원 2만2535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응답 수 2790건, 응답률12.4%)에 따르면, 약국의 수급불안정 의약품은 '11개 이상'이 37%에 달했다.
뒤를 이어 '7~10개'와 '3~6개'는 모두 30%, '1~2개'는 3%, '없다'는 0%(0.0007%)로 나타났다. 즉, 약 97%의 약국이 3개 이상의 약품 수급에 불편함을 겪고 있는 상황인 것.
서울시약사회가 지난해 11월 조사한 품절약 실태조사 자료에서도▲조제용 해열진통제 시럽(타이레놀현탁액, 세토펜현탁액, 부루펜시럽, 맥시부펜시럽) ▲진해거담시럽(암브로콜시럽, 록솔씨시럽) ▲포리부틴건조시럽 ▲이모튼캡슐 ▲아세트아미노펜서방정 ▲기관지 패치(호쿠날린 패치, 노테몬 패치) ▲슈다페드정 ▲천식치료제(풀미코트레스퓰 분무현탁액, 풀미칸 분무용현탁액) ▲알파간피점안액, 포러스안연고, 트레시바플렉스터치주, 트루리시티주, 리조덱스터치주 등이 동일성분을 가진 제품군이 모두 품절돼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의약품으로 확인된 바 있다.
더욱이, 어린이 천식약 및 감기약 등 '1년 이상' 장기 품절약은 23품목, 수시 공급불안정 의약품 71품목, 일시품절 38품목 등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여러 품목이 동시다발적으로 품절되는 상황은 특정 질환에 대한 일부 약만이 아니라 의약품 전반으로 수급불안정 사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민필기 부회장은 "코로나(COVID-19) 팬데믹 이전에는 일부 개별 품목 몇 개가 수급불안정인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만성질환, 항암제 등으로까지 수급불안정 품목이 확대됐다"면서 "현재 100품목 이상 수급불안정인 상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요청이 들어오는 품목은 10개 정도"라고 현황을 전했다.
한 품목의 품절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약품이 '품절'이 뜬다. 한 가지 품목이 아닌 여러 품목에서 '품절' 알림이 끊이지 않고 나타나니 약사들은 수급불안정의 심각성을 가장 크게 체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민 부회장은 "약사회에서 월 단위로 수급불안정 품목을 파악하고 있지만, 의약품 수급불안정 상황은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굉장히 유동적이다"라며 "약사회의 균등공급, 지난해 구성된 민관협의체가 의약품 수급불안정 해결을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급불안정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처방 및 조제 현장에서의 속앓이는 여전한 상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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