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파나뉴스 = 최성훈 기자] #. 국내 영상진단기기 제조사인 A기업에게 있어 작년은 '악몽'이었다. 국내서만 영상진단장비 판매로 2023년 62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작년 매출은 약 8억6000만원에 그쳤다.
#. 국내 피부미용기기 제조사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외국인 의료관광객이 대거 국내 피부과·성형외과로 몰리면서다. 실제 시술건수 증가 지표로 활용할 수 있는 소모용 팁(Tip)의 국내 매출은 각 피부 의료기기 제조사마다 약 30%에서 많게는 40%까지 상승했다.
국내 의료기기 산업계의 작년 영업환경은 업종에 따라 ‘부익부 빈익빈’이었다. 지난 1년간 지속된 의정 갈등으로 인해 전통 의료기기 업체의 매출은 준 반면, 피부미용기기 업체는 호황을 맞이했다.
특히 대학병원을 통해 매출이 발생하는 의료기기 업체들은 더 큰 타격을 입었다. 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수술, 입원, 검사건수가 크게 준 탓이다.
메디파나뉴스가 창간 19주년을 맞아 의료기기 업계 다수 관계자를 대상으로 취재한 지난 1년 영업환경 변화에 대해 물은 결과, 종합병원을 중심으로 매출이 악화됐다고 답했다.
의료기기 업계 A관계자는 "작년 3월 종합병원을 중심으로 매출이 30%, 4월부턴 매출이 50% 감소했다가 하반기 들어 조금씩 회복했다"며 "조금씩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의료기기 업계 B관계자도 "의정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신규 계약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며 "2차 병원에서는 비교적 선방했지만, 상급종합병원은 거의 70% 가까이 매출이 빠진 상황"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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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병원 수술 감소에 외국계 회사도 몸살
외국계 의료기기 회사들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특정 수술에 단독으로 공급하는 제품이 많은 만큼, 해당 영역에서 더욱 큰 타격을 입었다는 설명이다.
실제 의정 갈등으로 인한 진료 공백으로 작년 국내 수술 건수는 감소했다. 상급종합병원의 경우 그 감소폭이 더욱 컸다.
보건복지부 진료량 모니터링에 따르면 국내 5대 대형병원의 지난해 2월 말 수술건수는 일평균 600건으로 전년 대비 절반 수준에 그쳤다.
이는 작년 상반기까지도 쉽사리 해결되지 못했다. 울산의대 교수 비대위에 따르면 서울아산병원의 지난해 6월 셋째주 수술건수는 76건으로 전년 같은 기간(209건) 대비 36%에 불과했다.
수술 건수 감소는 곧 외국계 의료기기 업체들의 매출 부진으로 이어졌다. 4월 결산법인인 외국계 의료기기 기업 C사와 9월 결산법인인 D사는 전년 대비 각각 6%, 7%씩 매출이 감소했다.
외국계 의료기기 업계 E관계자는 "(회사 별로) 구체적인 매출 감소 추이는 곧 감사보고서를 통해 확인이 되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공급"이라며 "신속하게 제품을 공급하는 게 중요한데 자꾸만 수술이 연기되거나 축소되는 상황에서 수요를 예측하는 일이 여간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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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납사 대금결제 기한 요구도 상황 악화
매출의 직접적인 감소도 심각한 타격이지만, 간접납품회사(간납사)들의 대금결제 기한 미루기도 큰 문제란 지적이다.
실제 서울대학교병원 계열 간납업체인 F사는 작년 3월 서울대학교병원,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의 의료기기 업체 대상 대금 지급시기를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변경했다. 의료 공백 장기화에 따른 현금이 부족한 탓을 이유로 들었다.
성모병원 계열의 G사도 작년 상반기 대금결제가 지연될 수 있음을 의료기기 업체에 통보했다가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기기 납품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을 무기로 의료기기 산업계로선 직접적인 매출 감소와 함께 결제대금 지연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린 셈이다.
앞서 A관계자는 "간납업체가 산업계에 요구하는 할인율이 평균 6~7%인 상황에서 의정 갈등 초기 대금 지급시기를 9개월간 미루자고 요구하는 업체도 있었다"며 "환자에게 필요한 필수 의료기기 공급에 차질이 생기는 등 공급망 자체를 무너뜨리는 사례가 발생했다"고 꼬집었다.
B관계자도 "대부분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인 국내 의료기기 업계는 물가 상승으로 가격 인상 요인이 커졌음에도 인상마저 하지 못했다"면서 "여건이 악화된 상황이 반복되면서 보유자금 및 자금 동원 능력이 떨어져 정리해고를 단행하는 회사도 40% 가까이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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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의료와 달리 호황 맞은 미용의료
의정 갈등 장기화로 기존 의료기기 업체들이 죽을 쑤면서 피부미용기기 사업으로 눈을 돌리는 업체들도 생겨났다. 불황이란 단어를 모를 정도로 관련 미용의료 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다.
덕분에 피부미용기기 제조업체까지 지난해 호황을 맞이했다. 외국인 의료 관광객이 미용 시술을 위해 대거 한국으로 몰려 온데다 피부 레이저 클리닉 수가 늘어나면서 시술 가격이 과거에 비해 저렴해졌기 때문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공개한 '2024 외국인 관광객 미용·성형 부가세 환급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6월까지 외국인관광객 미용성형 부가세 환급 건수는 약 41만건으로 전년 총 환급 건수인 약 38만건을 훌쩍 넘어섰다.
덕분에 피부미용기기 제조사인 클래시스의 작년 국내 소모품(카트리지, 팁 등) 매출은 453억원으로 전년(332억원)대비 약 37% 늘었다. 제이시스메디칼과 비올도 작년 국내 소모품 매출은 전년 대비 각각 약 26%, 약 33% 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레이저 전문 헬스케어 기업인 라메디텍은 지난해 미용용 레이저 사업 확장을 본격화했다. 라메디텍은 레이저 채혈기 제조사였지만, 현재 글로벌 에스테틱 기업과 미용기기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피부미용기기 업계 H관계자는 "피부‧미용‧성형 시장이 팽창하면서 일부 사직 전공의들도 클리닉을 개원하거나 봉직의로 근무하는 경우도 봤다"며 "공급이 늘어남에 따라 관련 미용 시장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의료기기 업계 I관계자는 "필수의료 인력의 장기간 이탈으로 관련 의료기기 제조사들은 무너지고 있는데, 피부미용 의료 시장은 호황인 모습을 보면 허탈하기까지 하다"라며 "의정 갈등이 하루빨리 마무리돼야 업계로서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빠르게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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